확산을 일으킨 지식 집적의 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구황작물로써 고구마가 조선에 자리 잡아가는 과정은 고구마 관련 지식이 종합되고 정리되어 가는 과정과 일치한다. 처음엔 고구마가 도입되면서 같이 들어온 일본식 재배법이 쓰이다가 점차 조선의 토질과 기후 특성에 맞는 재배법으로 발전되어 갔다.

 

여기에 중국에서 활용되던 고구마 재배 지식이 들어오고, 조선만의 토착적인 고구마 재배법이 더해짐으로써 우리만의 독특한 지식이 만들어 졌다. 즉 우리 지식을 만들기 전에 일본과 중국의 지식을 최대한 벤치마킹한 뒤 이를 기반으로 ‘우리 것 화(化)’ 해 나갔다. 고구마에 관한 한, 한국형 ‘밑바탕 지식’을 정립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오늘날 우리 산업을 이해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산업화에서 후발주자였지만, 그간 벤치마크를 통해 성장의 조건을 획득하여 90년대 이후 많은 분야에서 창조적 리더로서 자리매김해 나갔다. 이는 산업 초기, 사업 영역에 한계를 긋지 않으려는 노력과, 지식을 지속적으로 누적시켜가며 연구개발 역량을 높여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에 변화하는 국제 산업 지형도도 유리하게 작용한 면이 크다.

 

그러나 근 20년 성세를 뒤로 하고 이제는 만만치 않은 초경쟁과 맞서고 있다. 벌써 그 후과는 나타나 대한민국 호를 이끈 주요 산업들은 하나같이 동력이 약화되거나 심장이 멈춰버리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벤치마킹만으로는 안 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는 절실한 자각이 필요한 때이다. 창조적 발상과 실험이 없고는 글로벌 리더십을 지킬 수 없다. 이 점에서 벤치마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제는 창조적 사고로 차원을 달리해 가며 대응해야 할 때이다. ‘고구마 혁명’의 21세기적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차세대 먹거리를 찾기 위한 국가적 노력이 지식 집적으로 이어질 때 한국경제는 다시 도약하게 될 것이다.

 

 

서유구의 경우

고구마 재배법은 심화된 지식 집적의 결정체였다. 19세기 초반 서유구가 지은⟪종저보⟫는 이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고구마 관련 지식은 어떻게 누적 효과를 발휘하며 확장되어 간 것일까?

 

서유구가 ⟪종저보⟫를 편찬하여 고구마 재배법을 종합 정리하기 이전에 가장 먼저 고구마 재배법을 소개한 것은 조엄의⟪해사일기⟫이다. 하지만 ⟪해사일기⟫는 조엄이 귀국하는 길에 대마도에서 일어난 사건, 보고 들은 견문 등을 기록하는 게 주요 목적이었다. 고구마 관련 종자재배법은 단지 일부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것도 대마도에서 얻은 지식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가 가져온 종자와 초기의 원천 지식은 멈추지 않았다.

 

서유구가 1835년에 지은 ⟪종저보⟫는 그 때까지 알려지고 정리된 고구마 재배법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다. 호남순찰사로 재임하던 시절 그는 고구마를, 여러 과실이나 채소 가운데 가장 늦게 조선에 출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근을 모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효능을 지닌 작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연해의 몇몇 읍에서만 고구마를 심어 전승하고 있었다. 서유구는 산골과 들판의 농민이 고구마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이유를 고구마 재배법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데서 찾고, 노령 남북을 돌아보면서 고구마 종자를 구해 보급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본격적으로 고구마 재배법을 정리하고 이를 당대의 목민관들에게 보급하려 한 것이다.

 

서유구는 고구마를 파종하는 적당한 시기로, 영호남 연해지방의 경우 청명 이후, 한남・한북의 경우 곡우 이후로 나누어 정리했다. 파종 적기는 ⟪농정전서⟫・⟪강씨감저보⟫・⟪종저보⟫가 서로 상충하는듯 하면서도 각자 고유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걸 보여준다. 조선의 특유한 기후조건과 각 지역의 국지적 기후여건을 감안하는 방향으로 지식 토착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서광계는 ⟪농정전서⟫에서 춘분 이후에 파종하는 것이 좋고 또 반드시 청명 이후에 파종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서유구는 이런 지적이 모두 남방의 파종 적기여서 조선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고구마 재배법에 지역적인 농업 환경 특색을 고려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경작법 정리 양상은 고구마 보급이 진전되는 양상과 동일하다. 고구마가 남해안 연안이라는 특정지역에서 벗어나 삼남 각지로 전파되면서, 또한 삼남지역을 넘어 한강 이남이나 한강 이북 지역으로 보급되면서, 각 지역의 기후 여건에 맞는 파종시기 등의 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유구의 ⟪종저보⟫는 중국 명나라의 서광계가 지은 ⟪감저소(甘藷疏)⟫, 강필리의 ⟪감저보⟫, 김장순의 ⟪감저보⟫등을 참고한 것으로 인용된 책들은 조선후기 고구마 재배법이 정리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은 각지의 농업환경을 고려해 지식을 현지 여건에 맞게 적용하고 보충해 가면서 보완·수정해 간 것을 뜻한다. 명실상부 현장중심형 지식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특이점은 우리 역사상 이렇게 단일 작물 재배법이 다양하게 편찬된 예는 없다는 점이다. 단연 고구마가 구황에 적절한 작물이었기 때문에 농서 편찬자들이 큰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강한 필요(needs)가 지식을 창출해 내는 과정을 고구마 보급사는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기업이 추구하는 원천 혁신은 기존 현상을 뛰어넘는 현상 타파적 관점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목하고 근본적인 혁신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기근 대책으로 조엄이 고구마 프로젝트를 수행한 것은 이 점에서 가장 성공적인 혁신 실례(實例)에 해당된다.

 

조엄 성공 요인으로 지적되는 요인이 몇 가지 있다. 그게 무엇일까?

 

첫째, 조엄은 벤치마킹할 핵심 성공 요인을 구체적으로 확정했다. 조엄이 벤치마크해 도입한 것은 고구마이자, 일본서 만난 일련의 재배법 도입이었다. 정확하게 맥락을 짚은 해법이었다.

 

둘째, 전문적인 자질과 다양한 경험을 갖춘 팀을 구성했다. 조엄이 초기 고구마 프로젝트 수행자들에게 부탁한 바나, 뒤에 다루겠지만, 사행 중 일본 식 수차를 보고 허규, 변박을 시켜 상세히 그리게 한 것은 팀 단위로 과제를 수행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 자신 또한 팀을 통해 일하도록 한 것이다.

 

셋째, 공동 추진자들을 확정한 것이다. 고구마 프로젝트에는 이응혁, 이광려와 강계현 팀, 강필리와 강필교 팀, 서영보, 이제화, 서유구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들이 주도해 강력한 혁신을 이뤄냈다. 성공의 릴레이 현상이 벌어졌다. 넷째, 강력한 실행력이다. 조엄은 자신 외에도 초발혁신가, 초발확산자들을 통해 고구마 재배 지식의 창출, 공유, 확산이 이루어지도록 유도하는 실행을 이뤄냈다.

 

이 같은 요인들이 성공적인 재배와 확산을 가져오게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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