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조돌변(一朝突變) 변신과 약탈로 지속침구의 조건을 상시화한다

 

왜구의 얼굴은 야누스적()이다. 왜구는 동아시아 해역에서 오랫동안 교역의 종사자를 자처해 왔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해로로 운반되는 재물을 약탈하는 약탈의 주역으로 활동해 왔다. 그러면서 동아시아 교역 질서를 교란시키는 기생집단으로 암약해 왔다. 왜의 이중적 얼굴은 여기에 있다.

 

해적 활동을 경제적 측면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일본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일본 측은 왜구에 대해 “11세기 이후 경제적 교역권으로 동아시아 세계가 형성되었는데, 이를 질서화하고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한 기구가 없어 해도(海盜)’가 표면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해적의 경제행위에 초점을 맞춘 주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왜구들의 침구·약탈·살인 등 반인륜적 행위는 희석되거나 지워진다.

 

일본에서 11세기는 전통적으로 세토(瀨戶) 내해(內海)의 해적들이 동아시아 해상으로 나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였다. 11세기 평청성(平淸盛) 시기에 이르러 해적활동에 관한 기록이 사라진 것은 송()과 정식으로 국교를 열고 교역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평청성은 내해의 유통을 독점하기 위해 해적 약탈의 위험성이 없는 안전한 해상 교통로를 유지하고자 했다. 당시 일본의 중앙 귀족이나 사사(社寺)에게 그는 최대의 교통 독점을 노리는 해적이었다. 그로 인해 여타의 해적들은 모두 그의 통솔 하로 편입되게 된다. 이처럼 산발적이고 소규모인 해적을 흡수·통합함으로써 군소 왜구의 약탈행위가 상대적으로 통제된 면은 있다. 일본의 자정적(自淨的) 통제는 왜구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면이 있다.

 

 

왜구 약탈 활동의 확산도: 일본 내해에서 동아시아 침구로

 

왜구는 시기를 불문하지 않고 침구해 왔으나, 11세기에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때 일본에서는 해적의 발호가 통제되는데, 이는 당시 실력자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盛)가 히로시마만(廣島灣) 남서부에 위치한 엄도(嚴島)에 근거지를 두고 일본 내해를 통해 외해(外海)로 나가는 중국과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군소 해적들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일본 내 왜구가 근절된 것은 교역활동이 왜구 활동보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올 때 말고는 없었다. 왜로서는 동아시아 평화는 단순 선택지일 뿐, 꼭 지켜야만 하는 필수요소는 아니었다. 근현대사에 들어 일본이 취한 침략 전쟁의 성격도 왜구식 사고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12세기 중반에 접어들면 상황은 일변하기 시작한다. 세토(瀨戶) 내해(內海)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일본 해적들이 점차 일본열도를 벗어나 활동영역을 해외로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일본 측 자료인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에도 항해하는 선박을 탈취하고 선적된 물품 약탈과 선원 살해 등 해적 행위를 한 것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고려사에 나타나는 기록으로는 12235월 왜구가 금주를 침입한 사건이 고대 이후로 왜구의 출현으로는 첫 번째 공식 기록이다.

 

이후에도 왜구는 계속 출현하는데, 12254월 왜선이 경상도 연안 마을에 출현하였고 다음해 정월에도 같은 도 지역에 침구했다. 계속해서 침구 행위는 이어져 12274월에는 금주를, 5월에는 능신현(能神縣)에 왜구가 또 출현했다. 이와 같이 1223년부터 일본 해상 무사단은 고려를 지속적으로 침구했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해상 무사단은 마쓰우라(松浦黨)였다. 이들은 규슈를 벗어나 원거리 항해를 통해 고려 또는 중국을 대상지로 약탈을 감행했다. 13세기부터 이들은 성격이 확연히 바뀌게 되는데, 이전의 역할이었던 일본 내해의 교역자, 유통의 주역, 일본 해적 등과 같은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동아시아의 약탈자’, ‘동아시아 질서의 교란자로 대변신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일본발() 동아시아 왜구의 등장이었다.

 

요는 이들의 행위가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욱 대담해 진다는 점이다. 1298년 중국 배가 원나라에서 귀항하는 도중에 난파되자, 일본인들이 배 7척으로 선당(船黨)’을 구성해 당선에 선적된 모든 물품을 약탈해 가는 해적 사건을 일으킨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선당이란 배의 무리, 즉 선단을 의미한다. 왜구의 해상활동 규모가 커지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이 시기 각 섬의 포구에 거주하는 거주민들은 이미 집단화되어 선단을 구성하고 통일적으로 무리를 지어 활동하고 있다. 청방문서(靑方文書)에는 규슈의 영주인 지두(地頭) 세력이 고려를 대상으로 약탈했다는 일본 최초의 기록이 보인다.

 

왜구는 흥리왜인처럼 상업을 하는 상왜(商倭)의 일면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약탈·살인 등 잔인한 행동을 일삼는 침구 집단이었다. 상왜는 한일 간 국교가 단절되어 통교가 불가능하거나, 무역왜인으로서 활동이 불가능할 때에는 왜구집단으로서 인접 국가를 침입하여 인명 납치, 약탈 행위를 자행했다. 어제까지 무역 왜인을 자처하던 자들이 언제 그랬냐 싶게 하루아침에 왜구로 돌변했다. 그러다 국교가 정상화되면 다시 무역 상왜로 활동하기도 했다. 합법과 비법불법을 넘나들며 상행위와 약탈 행위를 반복적으로 실시해 온 것이다.

 

왜구가 극성을 부리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작용한다. 이는 문명이 대륙에서 열도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방증해 주고 있는데, 전국시대에는 특히 철(), 초석(硝石), 면포(綿布) 같은 물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일본은 은을 수출하고 이 같은 물건을 얻고자 했는데, 문제는 이런 물품이 평화적 교역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어떤 물건은 교역보다 약탈이 더 효과적으로 많은 물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또한 약탈은 교역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물품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교역에는 지불 대가가 필요했지만 약탈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특히 철, 초석(硝石), 면포(綿布) 와 같은 물건은 군사적 목적으로 쓰일 수 있어 점차 수요가 증가했다. 하지만 교역을 통해서는 이런 재화를 간단히 구할 수 없었다. 이제 약탈은 물품 획득의 주요수단이 된다.

 

또한 14~15세기 왜구의 경우에는 가장 큰 약탈 대상물이 사람이었는데, 사람은 교역을 통해서 얻을 수 없었다. 이제 일본으로서는 특유의 일탈적 방법을 동원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약탈은 일본인이 생각하기에 물품과 인력 획득의 가장 적절한 수단이었다. 이제 그간 숨겨 왔던 왜구 근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때가 되었다. 이들은 확대된 동아시아 해상에서 무장 상인왜구사이를 오가며 12악역으로 노략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침구를 통해 약탈적 방식으로 다른 나라와 접한 결과, ()는 하나의 학습효과를 알게 되는데, 즉 약탈에는 거래비용이 없다는 점이었다. 왜구들의 이 같은 인식은 근대 일본 육군 군인으로 1931년 남만주철도 폭파 사건을 조작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시하라 간지(石原 莞爾)의 주장과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는우리의 국방의 방침이란 발표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본은) “한 푼도 돈을 내지 않는방침 하에 전쟁을 수행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20년 내지 30년도 계속해서 전쟁할 수 있다.

 

전쟁광적 태도도 인류사적 죄악이지만, 약탈을 근거로 전쟁을 치루겠다는 근대 왜구식사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왜구의 약탈적 사고1, 2차 대전 시기 일본이 전쟁을 통해 계속 침구할 자원을 끌어 모으는 과정과 완벽히 중첩된다.

 

일본이 지닌 왜구관(倭寇觀)’은 오랜 기간 동아시아 세계에 크나큰 위협으로 작용해 왔고 지금도 엄연히 진행 중에 있다. 그 뿌리에서 나온 줄기가 지금 일본 극우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약탈로 남의 물건과 인명을 탈취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있을 수 없는 행위지만, 이들에게 약탈식 사고는 그저 일상적인 것일 뿐이었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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