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족(漢族)의 허구적인 적자 확대론


누르하치 시기에도 대(對)중국 무역은 활발해 약 200명에서 600명에 이르는 여진족 사신들이 북경을 방문했다. 방문할 때마다 이들은 그들의 지도자만큼이나 영리한 방법으로 명 조정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파악하고, 수집했다. 누르하치의 전략상 가장 뛰어난 것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첩보전은 이미 이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우려해 명은 남여진의 북쪽 경계인 무순에다가 마시(馬市)를 세워 여진사신들이 만리장성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또 망루를 세워 각기 5명의 군사로 수비케 하여 여진 부족원들의 이동을 철저히 감시, 경계하였다. 나아가 회유책도 동원했다. 이는 한족이 오랜 역사 동안 변방의 민족에게 써오던 지극히 일반적인 수법이었다. 예를 들어, 1467년 명조는 여진족 추장들에게 조서(詔書)를 보내 다음과 같이 회유한 바 있다.


“너희 지역의 백성도 모두 적자(赤子)로 생각한다.”

얼마나 가당찮고, 기고만장한 언사인가? 한족의 중국은 바로 이와 같은 회유와 협박이라는 양면 전략을 구사하며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정책을 지켜왔다. 이에 대해 여진족의 대응은 변함없었다. 여진족은 습격과 약탈 행위를 지속적으로 수행하였고, 마치 이리가 죽어서도 그 근성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굴복하지 않았다. 명에 대해 공순한 입장을 취한 것은 결정적으로 유리한 시기가 도래하기 전까지의 태도에 불과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수렵 및 목축 경제로 대외 교역을 하지 않으면 아예 경제 활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 같이 표리부동한 대 중국 태도는 여진족으로서는 겉으로라도 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기도 했다.

적의 아군은 나의 적

나아가 명과 손을 잡은 다른 여진 부족들은 철저하게 누르하치의 적이 되었다. 명에 의해 그 많은 재화와 세력을 형성할 수 있던 누르하치였건만, 그는 끝내 지배자의 하수인이 되지 않았다. 대신 지배자를 지배하는 자로 거듭났다. 그럼으로써 스스로 강대해져 여진 사회의 오랜 침체와 유약함을 몰아냈다. 명을 원수 대하듯 대한 것은 살아생전 한 치도 변함없는 신념이었다. 그에겐 유약함이란 결코 들어설 곳이 없었다.

한편 명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여진 내부의 다른 적대 세력들에 대해서도 누르하치는 가혹했다. 겉으로 보기에 누르하치가 그들을 제거해 나갔던 것은 친명(親明)적 태도로 보였으나, 그것은 여진을 통일해 나가는 지난한 몸짓에 다름 아니었다. 이를 통해 누르하치는 통일된 힘을 얻어 마침내 명과 대적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595년에 명은 누르하치에게 ‘용호장군(龍虎將軍)’이란 칭호를 주었는데 여진 추장으로서는 전례가 없는 대우였다. 누르하치는 여진 부족을 어느 정도 통합한 후 소수 추장들의 충성을 받아들여 1590년 백 여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북경으로 공물을 바치러 간다. 이러한 조공 외교는 1609년까지 계속되었다.

북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산해관을 지나며 누르하치가 무엇을 생각했을는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는 눈에 밟히는 모든 것들을 필름처럼 각인시켜 머릿속에 저장해 놓았을 것이며, 언젠가 이 길을 정복군의 대열을 이끌고 지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게 북경행 여정은 살아 있는 정보들을 모으는 적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 축적 과정과도 같았다. 북경을 오가며 누르하치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는 미래를 설계하지 않았을까. 굴신하되, 굴신하지 않는 그의 자세는 대륙 경영자의 기세이자, 기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적 행태의 묘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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