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철제 등자(鐙子)의 등장은 이들 유목민들의 손을 자유롭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등자는 말을 탈 때 디디는 제구를 말한다. 적어도 3, 4세기까지 유목 기병들은 아시리아의 발판과 스키타이 인디안의 발(足)거리 쇠사슬처럼 철제 등자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제 말을 타면 두 발을 지탱할 수 있었고, 이는 두 손의 자유를 가져왔다. 가히 획기적인 발명품이 인류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두 손의 자유는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있는 기술을 급격히 강화시켰다. 이제 승마인들은 활을 당기면서 안장 발거리를 딛고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등자는 말 엉덩이 너머로 쏘는 파르티아식(式) 활쏘기를 가능하게 했다. 우리나라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활쏘기는 바로 이 같은 장면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병은 화약이 등장하기 전까지 적어도 천 년간 군사력의 우위를 가능케 했던 주요 수단이었다.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으로 시작해서 중국을 손에 넣었던 민족들의 특징은 바로 이 위대한 속도의 병기를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병부대에 맞서 중국의 농민보병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말을 탄 보병 수준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로써는 대단한 기술적 우위였으며, 철기병의 조직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누르하치가 중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더 신속히, 전술적으로 말을 운용했기 때문이다.

속도 경영과 강력한 전력 우위

초원에서의 말은 군사력을 대표한다. 알다시피 먹고 달리는 유목 생활은 하루도 빠짐없이 속도와의 전쟁이다. 이미 947년에 건국된 요나라 때부터 말은 제국의 역전제(驛傳制)를 유지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 시기에 이미 하루에 700리, 즉 약 230마일의 빠른 속도로 편지를 전달하였다고 하니 그 속도가 가히 짐작이 간다. 이는 역전제도(驛傳制度)상 최고의 기록이다. 마치 오늘날 어디로든 자유스럽게 흐르는 정보의 네트웍인 인터넷을 연상케 한다.

나아가 말을 이용한 군사 작전은 빠른 이동과 빠른 수비의 공수 전환을 쉽게 했고, 치고 빠지는 히트 앤 런(hit and run)식 군사 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행동반경이 그 만큼 더 넓어진 것을 의미한다. 누르하치가 각 성을 도모하고 신속히 철수 내지 이동했던 것은 고립되는 상황을 피하려는 전술에서였지만 말을 다룬 오랜 경험에서 속도가 주무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을 통해 계속 움직였고, 기동력을 통해 적을 제압했던 것이다.

나아가 말의 기동력에 행동의 민첩성을 더 부여하고자 여진족 무사들은 가볍게 몸을 치장 했다. 그들의 갑옷은 무사의 몸놀림을 편하게 하기 위해 부드럽고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 진 것이었다. 조선을 찾은 명나라 사신 퉁훼(董越)가『조선부(朝鮮賦)』에서 조선종이가 누에고치같이 탄력 있고 질기다고 평한 것은 팔기군의 갑옷에 견직과 면직이 사용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여진 사람들은 조선종이로 갑옷을 만들면 화살이 잘 뚫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조선종이를 찾았던 것이다.

야생의 피를 끌어들여 성장한 중국

중국은 이민족과 잦은 인터페이스 덕분에 끊임없이 변화 발전할 수 있었다. 중국 역사는 다름 아닌 변증법적 통일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족 자체의 구조가 더 이상 성장 엔진이 되지 못할 때에는 이민족이 중국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마치 늙은 포도나무에 찔레 순을 접붙이기 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럼으로써 중국은 젊은 야생의 피를 받아 오랜 시간 그 수명을 연장해 올 수 있었다. 이는 찔레나무로 비유되는 측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풍요로움에 닿는 순간 그들은 야생성보다는 보다 안락한 삶을 선택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야생성을 더는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변경지역 유목민 지도자가 세력을 얻는 비결은 항상 중국식 행정기구의 양식을 습득하는 그의 능력에 달려 있었으니,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상인, 농민, 그리고 부족의 전사들을 통제하는데 기초를 둔 혼성정권(混成正權)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인민들은 본의거나 본의가 아니거나 불가피하게 변경지방에서 그러한 이적지배자(夷狄支配者)가 일어나는데 역할을 담당했다.”

요컨대, 중국 내 한족의 내적 조건이 변경 세력으로 하여금 중국 진출을 가져오게 한 동인이었다는 얘기다. 이 불안한 한족과 (한족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민족간의 협동에서 이민족의 통치자들은 패권을 잡는 자로서 특별한 기능을 수행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수적으로 보다 우세한 한족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은 변경 지방으로부터 멀리 밀고 들어가 중국에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결국 중국사는 중국을 지배한 이민족 전사(戰士)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여진의 누르하치도 분명 이 야심찬 무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없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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