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우리민족이 세운 대표적 국가로 만주일대와 한반도 중부 이북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및 광범위한 해양영토를 보유한 대제국이었다. 기원전 37년에 남만주에서 건국되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북부여를 계승했는데, 북부여는 현재 북만주인 대홍안령 일대에서 남만주 일대에 걸친 반농ㆍ반유목의 나라였다.

고구려는 건국하자마자 주변에 있었던 소국들을 신속하게 병합해 나간다. 확장의 시점을 실기하지 않고, 국운융성의 기회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창업 이래 700여년 이상을 존속하면서 독특한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주변종족들을 아우른 세계국가를 일구어냈다. 이 같은 팽창은 고구려인의 진취적 기상이 반영된 것으로, 막강한 군사력의 기초가 된다. 이런 연유로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밑바탕으로 정복국가를 자임 하며 그 활동 반경을 대륙과 해양에서 넓혀 나간다. 다른 한편, 영토의 확대와 더불어 경제여건이 향상되자 고구려인만의 독특하고 성숙된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고구려는 창업 이래 자신들의 역사적 사명으로 고토회복을 삼는다. 지난 과거의 역사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 팽창의 주요 배경은 경제적 목적 이외에 이처럼 고조선을 계승하고 고토를 회복하려는 국가적 목표 때문이었다.

태왕 개인도 숭조(崇祖) 신념이 뚜렷했다. 이는 창업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시조 동명성왕을 받들고 시조의 정치관을 내세워 천하에 선포한다. 시조의 묘당을 참배하면서 평소에는 유화의 소상(塑像)항상 대동하고 다녔다. 그런 까닭에 온 나라, 성읍마다 이 소상이 없는 곳이 없었다. 훗날 당(唐)이 고구려를 칠 때 그 성읍의 소상이 3일 동안이나 피눈물을 흘리고, 울음소리를 냈다고 전한다. 이에 성민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싸워서, 당군(唐軍)이 그 성읍들을 점령하지 못했다고 당나라 전사(戰史)는 남기고 있다. 고조선의 계승자이자, 숭조 정신을 지닌 것은 고구려인들의 애국애족의 정신을 키우고 온 국민을 하나로 묶는데 크게 기여한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처음으로 인접한 비류국을 병합하고 그곳의 이름을 다물도(多勿都)라 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다물(多勿)’이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고조선 영토, 즉 고토에 대한 회복의지가 얼마나 강했으면, 첫 번째로 병합한 나라를 다물도라 명명했을까 싶다. 고토회복이 표현된 다물(多勿)사상은 고구려의 정신적 뿌리이자, 창업 이래 한결같은 경영지표였다. 고구려는 한족(漢族) 및 북방유목종족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면서 한편으로 영토를 확대하고 다른 한편으로 수성을 위해 외적의 침입을 방어했다. 이 같은 지속투쟁의 역사가 고구려의 역사였다.

그런 고구려는 마침내 5세기에 들어 태왕이 등장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고구려인의 소망이 태왕 태에 이르러 마침내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때 우리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마련하게 된다. 중국 북부는 물론 몽고의 동부와 연해주까지 세력이 미침으로써 일단의 성공을 보인다. 명실상부한 대제국의 기틀을 쌓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영토 확장만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을 넘어서 고조선이 추구했던 천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확장은 상승 작용을 일으켜 동서남북의 전방위 공략 정책을 취하여 마침내 북만주 일대와 연해주지역, 요동반도, 그리고 남으로는 한강 이남까지 확대해 나간다. 또한 해양활동을 활발히 추진해 동해 및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일본열도에까지 세력이 뻗친다. 동북아의 강건한 패자로 부상하는 것이다.

ⓒ전경일, <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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