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왕의 기록 중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
그것은 태왕은 살아서 자신의 능을 지킬 수묘연호(守墓煙戶)에 대해서 명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존시유교(存時遺敎)’라 한다. 즉, 태왕은 자신이 죽은 다음에 능을 지킬 수묘연호(守墓煙戶)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이 내원(來源)하게 된 배경, 능을 지킬 인가(人家)의 수, 태왕 자신이 제정한 조상 묘에 비를 세우는 것, 그리고 연호 등을 제정한 것이다. 이는 능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나는 구민이 더욱 약(弱)질까 염려하니 만약 내가 죽은 후 (나의) 묘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단지 내가 몸소 돌아다니며 약탈(전리품 노획을 뜻함.)하여 온 바의 신래한예(新來韓穢)를 뽑아서 (그들로) 하여금 (수묘와) 청소에 대비토록 하라.

이 같은 살아서의 명령으로 특기할 점은 수묘제를 정함에 있어 ‘구민(舊民)’ 대신 ‘신래한예(新來韓穢)’를 쓰라고 지시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래한예(新來韓穢)’란 태왕 자신이 정복하여 이끌어온 한(韓)족과 예(穢)족을 말한다. 왕의 수묘를 할 때 이전에는 본래의 고구려인인 ‘구민(舊民)’이 맡아서 했는데, 이들이 첨차 쇠잔하여질 것이 염려되어 피정복민으로 수묘를 하라고 한 것이다. 비문 영락 8년조에 ‘남녀 300인을 노략하여 얻었다.’는 대목으로 볼 때 이들은 가족단위로 정복된 지역에서 차출된 사람들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 한(韓)과 예(穢)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노획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태왕은 구민 약화에 대한 우려와 신민에 대한 전폭적인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부족자(富足者)들이 수묘인을 매매하는 것을 금하고, 강력한 벌칙 법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수묘인은 지금 이후 다시 서로 전매할 수 없으며 비록 부유한 자(富足之子)가 있더라도 또한 함부로 살 수 없다. 그(들이) 명을 어김이 있으면 (수묘인을)판자는 형을 주고 산 자는 법령에 따라 수묘시키도록 하라.

태왕의 이 같은 명령에도 불구하고 장수왕은 부왕의 명령을 따르면서 한편으로 새로 이끌어 온 백성, 즉 ‘신민(新民)’만으로 수묘를 하게 할 때 오히려 법도를 잘 모를 것을 염려해 구민과 신민의 비를 1:1로 배치한다. 존시유교를 지키면서 탄력성 있게 이를 적용했던 것이다.

이 같은 수묘인 제는 이전의 전통을 바꾼 매우 특별하고 중대한 개혁이었다. 이 시기 태왕의 독자적이며 특별한 시호로 과거의 장지명(葬地名)식에도 일대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호상의 태왕의 업적을 드러내고 태왕을 찬양한 것은 왕권이 그만큼 강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입비제(立碑制)와 수묘인연호제(守墓人烟戶制)는 능비가 고구려에서는 발달하지 못한 묘비로써 최초의 예라는 것과, 입석(立石) 전통을 이은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비의 모양과 크기, 글과 글씨 등등 여러 면에서 고구려 문화의 독보적인 수준을 가늠케 한다.

그런데 이 같은 수묘연에는 국연(國煙)이 있고 간연(看煙)이 있었다. 양쪽을 비교해 보면, 국연은 간연에 비해 신분이 높았다. 이들은 제사를 담당하며 간연을 통솔했다. 반면, 간연은 능을 지키며 청소하고 보수하는 등 허드렛일을 맡았다. 비문에는 국연과 간연이 정확히 1:10으로 편제되어 있다. 원래 고구려인으로서는 국연이 10가(家), 간연이 100가(家)이며, 신민은 국연이 20가, 간연이 200가이다. 1:10, 1:2의 비율인 셈이다. 이 같은 국연과 간연의 비율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성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가 활발한 외정활동을 통해 피지배층을 대거 확보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중국의 경우에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대체로 1:10인 경우를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동북아 최강국인 고구려에서도 같은 비율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인들은 숫자상으로 자신보다 대략 10배나 큰 이족(異族)을 지배했다. 이는 고구려 사회가 대대적으로 확장해 나가며 자연스럽게 나타난 제국적 위용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구민과 신민의 비율인 1:2도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 비례치로 볼 수 있다. 북위(北魏)의 역사를 적은 『위서』고구려 전에는 장수왕 때 고구려에 온 북위의 사신이 고구려의 사정을 알아보았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거기에 고구려 백성의 홋수가 기존 주민의 2배로 나타난다. 이를 근거로 유추해 볼 때, 고구려는 최소한 두 배 이상이나 되는 이족을 지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이 구민과 신민의 수묘연 구성에 반영된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사후 세계도 현생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태왕이 수묘제를 강조하는 것은 고구려인의 사후관(死後觀)을 반영하는 셈이다. 이런 연유로 수묘인도 백성의 구성비를 참작해 정했던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태왕은 살아있을 때 ‘만년 후’까지도 자신의 무덤을 수묘할 자들을 자신이 정복하여 데려온 한족과 예족민으로 하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외정의 성과가 능비를 지키는 사람들의 내역 및 구성비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전경일, <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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