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까마귀는 틀림없이 밀밭을 다 먹어치울 거요

예술은 무엇을 그려내는가? 숫한 예인(藝人)들이 화두로 삼고 있는 문제가 이것일 것이다. 내가 내린 정의는 예술은 표상(表象)을 잡아내고, 심상(心象)을 불어 넣으며, 화가일 경우에는 그가 지향하는 완성된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다. ‘이것이 그림이다!’라고 외칠 수 있을 만한 것, 그것을 화폭에 잡아넣고자 평생 붓을 휘두른다. 그 때문에 화가가 절실히 느꼈을 밖의 세계는 내면세계와 중첩되며 그림에 오롯이 배어난다. 기능만으로 그린 그림과 혼을 담은 그림이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 두 절대 화가와 그들이 남긴 작품은 혼의 세계를 웅변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가)

(나)

(다)

                                                                                                                                                                

3 점의 빈센트 반 고흐(1853.3.30.~1890.7.29)의 작품들. () 까마귀가 나는 밀밭(Wheat Field with Crows), 1890, 캔버스에 유화, 50.5×103cm. 거친 폭풍 속에서 밀밭 위를 종횡하는 까마귀의 강렬한 비상과 곧이어 해체될 밀밭의 풍경을 장엄한 풍요 속에서 양자가 지닌 강한 생명력으로 묘사해 내고 있다. () 나무뿌리와 줄기들(Tree Roots and Trunks), 1890, 캔버스에 유화, 50×100cm. 뿌리와 줄기가 뒤엉키며 인간의 마디진 뼈같이 묘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이 포도나무는 생명인 대지를 향해 몸부림치고 있는 화가 자신을 드러낸다. 풍요의 포도송이는 과감하게 생략되어 생명의 끈질김에 집중되어 있다. () 도비니의 정원(Daubigny's Garden), 1890, 캔버스에 유화, 103x53cm. 고흐가 특별히 찬탄해 마지않던 많은 예술가들이 모이던 도비니의 정원은 예술가의 영혼이 머물고 싶었던 곳이다. 죽음을 앞둔 고흐에게는 지친 영혼을 쉬게 할 곳이 필요했다. 안식과 안정 그리고

 

 

우선 한국과 일본에서 지선(至善)의 사랑을 받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예술 세계를 살펴보자.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고흐가 생애 마지막 3주 전에 그린 그림이다. 그가 1890729일에 권총 자살을 했고, 마지막으로 손댄 작품이나무뿌리와 몸통(Tree Roots and Trunks)도비니의 정원(Daubigny's Garden)임으로 이 작품은 77일에서 10일 사이에 그려진 것이다. 앞서 두 작품은 그 뒤 19일 사이에 완성된 것이다.

 

이 마지막 세 작품은 고흐가 생애에 희구한 바가 무엇인지를 손에 잡힐 듯 감지하게 해 준다.나무뿌리와 몸통죽기 직전 아침에 햇빛과 생명으로 가득한 나무덤불을 그린 것이다. 가까스로 대지를 붙잡고 일어서려는 나무뿌리의 강렬한 의지를 통해 생명에의 본능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 나무는 틀림없이 위는 과감하게 생략되고 만(위에는 아마 풍요로 상징되는 포도송이를 달고 있을,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신의 몫이 될 수 없다는 명백한 선언을 하듯이) 뿌리와 줄기 부분만 드러나 있는 뒤틀린 포도나무다. 나무는 아무리 생명에의 몸부림을 쳐도 대지에 진입해 들어가지 못한다.

 

이 점이 역설적으로 생명에의 약동을 진동시킨다.도비니의 정원은 너무나 평화스런 정원 풍경을 통해 안정을 희구하고픈 그의 영혼을 잘 보여준다. 삶을 편안하게 내려놓을 안식처는 바로 앞에 있지만, 그는 끝내 그것을 붙잡지 못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까마귀[불행의 상징]가 밀밭을 다 먹어치웠기 때문이다.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린 뒤 19일 동안 이 수많은 까마귀 떼는 밀밭을 덮쳤을 것이고, 밀밭은 곧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7월이면 새들은 식성이 어느 때보다 왕성했을 테고, 어미들과 더불어 갓 부화해 날기 시작한 새끼 까마귀들은 밀밭을 폭격하듯 덮쳤을 것이다. 이론적으로 400제곱미터의 밀밭에 1000마리의 까마귀가 덮치면 밀밭은 쑥밭이 되고 만다. 며칠 못가서 밀밭은 타작마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적나라한 생명과 치열한 투쟁에의 광경은 고흐나 그림 관람자들에게 생명의 충만과 원기와 그악스러움을 선사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두고 흔히들 대지가 폭풍 속에서 바다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가운데 까마귀 떼가 나는 모습을 통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흐의 종말론적 잠재의식이 나타나 있다고 주장한다. 또 영혼의 고독과 절망감을 송두리째 토해 내는 고흐 식 생의 완결편이 표현되어 있다고도 한다. 하늘의 검푸른 빛과 밀밭의 억센 노란 빛 사이를 헤치고 길은 세 갈래로 나 있고, 그 중 하나는 저 먼 피안과 영겁으로 이어진 길이다. 맑은 영혼일수록 깃들지 못하고 길 위에 머문다. 누구도 길 위에서 생을 마친다. 가장 명징하고 강렬한 영혼일수록 거처를 잡지 못한다. 그리하여 화가는 끝내 가운데 난 길로 가지 못하고 길속에서 자신을 잠재운다. 이것이 고흐가 짊어진 운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둘 게 있다. 그것은 이 혼의 화가든 누구든 간에 폭풍 속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까마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겪는 모든 것들은 인생의 진실을 밝히는 한 면이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나는 밀과 사람이 같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다. 사람이 땅에 심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결국 맷돌에 갈려 빵이 되어 버릴 것을. 불행과 행복의 차이라! 둘 다 죽음이나 소멸같이 유용하고 필요한 것이지······ 매우 상대적이다. 그리고 삶 또한 똑같다.”

- 편지 607중에서

 

마치 이 말은 뒤에 다룰 꼭지(2부 관찰편의 학문을 너무 잘게 썰지 마세요.’)에서 페히너가 한 말(“식물은 인간이란 두 발 가진 짐승은 왜 저리도 분주하게 돌아다닐까 항상 궁금해 하지”)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너무나 잘 알려진 생텍쥐페리의 말(“사람들은 뿌리가 없어서 바람결에 불려 다니지”)을 떠올리게 한다. 이 두 말은 동의(同意)의 문장이자, 인간 존재에 대한 간파다. 대지에 뿌리 내리지 못하는 인간의, 인간 존재의 가냘픔을 통찰했을 때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삶은 가장 편안한 순간조차 혹독하다. 순진하게 땅에 심어진 것들조차 까마귀 떼의 공격을 받아야 하고, 맷돌 같이 지독한 냉담에 짓눌려 인간은 갈려지는 운명에 놓인다. 갈려진 인간이 갈려진 밀을 삼킨다. 밀은 남의 위장에 들어가 인간의 허기를 채우는 일을 묵묵히 수행해야만 한다. 가여운 것들이란! 밀이란 존재들이란! , 허기진 영혼을 채워야만 하는 인간들이란!

 

고흐가 느꼈을 절대 고립고독이 주는 세계를 조선 화단에서 말년의 단원(檀園) 김홍도에게서 찾을 수 있다. 둘은 많은 부분 이미지가 겹쳐진다. “단원 이전에 단원 없었고, 단원 이후에 단원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선 회회사의 총결산이라 할 김홍도의 말년은 그야말로 고독이 뚝뚝 떨어지며 신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단원 김홍도(1745~1806?)추성부도(秋聲賦圖). 인생의 종착점에 이른 삶의 허무함을, 단원은 그림에 구양수의 부()를 적어 표현했다. 단원은 세상의 모진 풍진을 겪고 한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죽기 며칠 전 이 대작으로 마무리했다. 그림 안에는 나무 사이에 달이 걸려 있고, 서풍에 낙엽은 지며 흩날린다. “가을 소리는 처량하고 애절하며 울부짖는 듯 떨치고 일어나고, 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진다. , 어찌하여 인생의 가을은 이리도 빨리 오는 것이냐?” 예술에 젖으면 인생의 한 철과 철없음을 알게 된다. 제 철 만난 봄꽃이 흐드러질 제에도 저들인들 어찌 알겠는가? 삶의 본바탕은 본시 짓밟힌 꽃들로 어지럽다는 것을.

 

 

한때 잘 나가던 천재는 중년 이후부터 가파른 내리막을 걸었다. 나이가 들며 몸도 급격히 쇠약해졌다. 마흔일곱 살 된 해에는 병을 앓고는 간신히 일어났다. 중년을 넘어서며 직장에서도 쫓겨나 생활도 곤궁해지고, 오십 대에는 항시 병으로 고생했다.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했다. 그런 단원에게는 글공부하는 열다섯 살 된 아들이 있었다. 일찍 과부가 된 딸은 몸마저 약하디 약했다. 그는 지치고 힘든 몸을 일으켜 늦게 얻은 아들인 연록에게 쓸쓸한 편지를 남겼다.

 

 

녹아에게, 날씨가 이처럼 차가운데 집안 모두 편안하고 너의 공부는 한결같으냐? 나의 병상은 모친에게 보낸 편지에 이미 다 말했으므로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너의 월사금을 보낼 수 없어 한탄스럽다. 정신이 어지러워 더는 쓰지 않는다.

- 18051219일 아버지가

 

 

몸져누워 있던 단원은 동지 지나 삼 일째 되던 날 어렵게 일어나 몸을 기댄 채추성부도(秋聲賦圖)를 그린다. 길이 2미터가 넘는 이 대작은 산중 서재에서 창밖의 둥근 달을 바라보며 시를 읊는 한 선비를 그리고 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학은 무엇을 예감하는 듯 입을 벌려 울어대고, 분분한 낙엽은 마당에 흩날린다. 마른 나뭇가지에는 나뭇잎들이 스산한 바람에 들붙어 서걱서걱 소리 내어 흔들리고 있다. 그림 왼쪽에는 송나라 구양수(歐陽修)가 지은 저 유명한가을을 노래함[秋聲賦]이 쓰여 있다. 계절이 지고 인생이 저물어 가는 풍경에 몸서리를 칠만큼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쓰인 글귀는 이러하다.

 

나는 밤에 책을 읽고 있다가 서남쪽에서 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뜩 놀라 귀 기울여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바스락바스락 낙엽지고 쓸쓸한 바람 부는 소리 같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가 치는 소리같이 변한다·······.

 

내가 동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가 좀 나가보아라.”

 

동자가 말했다.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는데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 슬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로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 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지도다.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온갖 근심이 마음에 느껴지고 만사가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하니 마음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리게 된다.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것까지 근심하게 되어서는 마땅히 홍안이 어느새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버리고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어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금석(金石) 같은 바탕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는가? 생각하건대 누가 저들을 죽이고 해하는가? 또한 어찌 가을의 소리를 한()하는가

 

동자는 아무 대답 없이 머리를 떨구고 자고 있다. 단지 사방 벽에서 벌레 우는 소리만 찌르륵찌르륵 들리니, 마치 나의 탄식을 돕기나 하는 듯하다. 을축년 동지 지나 삼 일 되는 날 단구가 그리다.

 

 

이것이 단원 김홍도의 마지막 그림이었다.

 

궁핍 속에서도 혼을 불사른 두 예술가를 밀밭 삼아 인간 세상은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까마귀 떼처럼 그악스럽게 달려든다. 밀밭이든 까마귀든, 서풍에 밀려오는 가을이든, 떨어지는 낙엽과 놀라 울어대는 학 따위든,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게 다 뭐란 말인가. 세상은 항시 폭풍이자 찬바람 세차게 불어 예는 노지(露地)인 것을! 억센 추위가 옷깃을 잡아끌고 성난 바람은 문을 두드린다. 그때조차 우리 문은 열릴 줄 모르고 안에서부터 굳게 잠겨 있다. 밖에는 나의 영혼이 떨고 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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