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수메르 농부와 조선 농부의 공통 가르침

 

몇 해 전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들이 오랜 시간 번역한 놀라운 고고학적 성취를 공개했다. 인류 4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인들이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새긴 무려 35000행에 달하는 방대한 신화, 전설, 역사, 속담 등 인류사의 초기 문학 작품을 공개한 것이다. 이 중 내 눈을 끈 것은 고대인들이 지은 농사력(農事曆)이다.

 

농사력은 기원전 4천년 경, 수메르 인의 주식인 보리 재배법을 기술한 문서로 세계 최고의 농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엔 수확량을 많이 얻기 위한 크고 작은 지식들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수메르 인들은 해마다 주기(週期)에 맞춰 농사를 짓고, 수확량을 늘려왔으며, 지식을 전수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점토판에 새겨진 표현처럼 어미 양에게 새끼 양을 낳게 하고······ 곡물을 밭에서 불어나게 해일대 번영이 일게 했다.

 

농사력 중 유독 내 관심을 끈 것은 짧은 길이의 명구인농부의 가르침(The farmer’s instructions)에 있다. 원래는 긴 내용일 것으로 보이나, 발견된 분량은 몇 쪽 안 된다. 내가 이 점토판에 새겨진 글 편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세종시대 농법을 연구한 바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생산성 향상을 가져 온 조선 최고(最高)의 농서농사직설(農事直說)처럼 고대 인류의 농서에서는 농법이 어떻게 기술되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를 살펴보면 인류의 생존, 번영, 문명을 가져온 근원적인 지식을 알 수 있다

 

점토판의 글귀는 늙은 농부가 어린 아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쳐 주는 탁월한 경구로 시작된다. 이들이야말로 인류 최초로 농사 관련 지식을 주고받은 멘토와 멘티이다. 이들의 농사 레슨은 어느 농서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일반적인 내용으로부터 시작된다. 가령 경작하기 위해 농지에 물을 끌어댈 때의 요령 같은 것들이다. 늙은 농부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기 경험을 교훈으로 들려준다.

    

 

“(아들아) 논밭을 경작을 할 때에는 도랑과 배수로, 제방 따위에 열린 구멍이 있나 잘 살펴보아야만 한다. 밭에 물이 넘치도록 할 때에는 수위가 너무 높지 않도록 항시 주의 하거라. 또 편자 박은 황소가 밭을 밟게 해 잡초가 다 뽑혀지도록 하고, 밭이 평평해지면 300그램 안 되는 가는 도끼로 밭을 고르고 평평하게 하여라.”

    

 

농사가 벌어지는 현장 지식이 생생하게 전수되고 있다. 더불어 늙은 아비는 세심한 주의 사항을 당부하고 있다.

이런 교훈은 경작을 위한 준비 단계로써 극히 상식적인 것에 해당될 것이다. 응당 농사를 지으려면 무논의 경우 논밭에 물을 대고 땅을 고르는 일부터 해야 할 테니 말이다. 물론 이 문장 전의 점토판은 발굴되지 않았음으로 첫 경구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농사는 공통요소가 많은 점을 감안할 때 우리와 별반 다를 것 같지 않다. 우리의 농서를 참작해 보면 그 옛날 수메르 인들의 경우에도 곡식의 씨앗준비(備穀種)부터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씨앗을 다루는 것이 무엇보다도 농사의 가장 중요한 원칙일 테니 말이다. 우리의직설에는 아홉 가지 곡식 씨앗을 다루고 거두는 원칙이 상세히 풀이되어 있다. 한번 예를 들어 보자.

    

 

씨앗을 고르는 데에는 견실한 것을 취해 잡종이 섞이지 않도록 하고, 또 씨앗이 젖어 있어도 안 된다. 잘 여문 씨앗을 구해서 파종해야 하는 바, 그 까닭은 잘 여물지 않은 씨앗은 이듬해 이삭이 잘 여물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된 종자는 씨앗의 태[]에서부터 이미 병을 잉태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농사의 제1원칙으로써 씨앗 선별법을 천명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을 구분해 내기 위한 또 다른 조치가 취해진다. 쭉정이는 키를 까불어 버린 뒤에 물에 담가 뜨는 것은 건져 버리고 가라앉은 것만을 취한다. 다시 이걸 충분히 말려 습기가 없게 한 후 짚으로 엮은 그릇에 통풍이 잘되도록 단단히 저장해 둔다. 파종 시 작황이 좋을 종자를 미리 알아보기 위함이다.

 

조선 농부의 부단한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엄별된 씨앗은 다시 한 되 베자루에 넣어 움집 안에 묻어 두고, 50일 후에 꺼내 보아 그 크기가 가장 많이 늘어난 것을 취한다. 바로 이 종자가 그해에 풍작이 될 종자다. 이런 방식으로 엄선된 씨앗만 골라 파종할 무렵 눈[] 녹은 물에 담가 두었다가 걸려내고 말리기를 두 번하거나, 소나 말의 오줌에 담가 걸러내어 볕에 말기기를 세 번 되풀이 한 다음에야 파종한다. 이는 겉껍질에 조그마한 상처를 주기 위해서인데, 이렇게 하면 발아가 촉진된다. 실로 까다로운 절차를 거친 후에라야 밭에 나가 심어질 종자가 선택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직설이나가르침이나 거의 같다. 발굴된 고대 점토판은 여기서부터 그 상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종자가 마련되면 그 다음에 땅갈이에 나선다. 이때 두 농서는 공히 땅갈이를 할 때의 원칙으로, 천천히 해서 땅이 부드럽게 하고, 소가 피로하지 않도록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몰아붙이기 식으로 일 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일은 지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을 때 효과가 높다. 이 점은 요즘의 일하는 방식과 많은 점에서 다르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가 원칙이다.

 

또 논에 물을 대는 요령과 각 작물별로 파종하고 가꾸는 요령을 아울러 다루고 있다.

올바른 파종법은가르침에도 나타나 늙은 농부는 아들에게 농사지을 때의 주의 사항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아들아) 보리심을 때에는 각별히 주의하여야 한다. 씨앗은 손가락 두 개 깊이로 파서 똑같이 심고, 땅이 잘 들어가지 않을 때에는 가래의 날 끝을 바꾸어라. 추수할 때에는 보리를 이삭의 무게로 휘게 하지 말고 최대한 무게를 견디고 있을 때 베어내야 한다.”

    

 

이와 함께 작물을 베고 마지막으로 탈곡하여 곡식을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들기까지 주요한 단계를 서술하고 있다. 한마디로 농사는 이렇게 지어야 하는 것이라는 교범을 아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두 책이 공히 강조하는 게 있다. 즉 농부로서의 자세, 근면함이다.가르침에서 늙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얘야) 농사일이 과하다 싶을 만큼 바쁠 때에는 조금도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농사일을 열심히 하라라고 말할 필요조차 없어야 한다. 하늘에 별이 뜰 때 일어나 황소처럼 부지런히 일 하거라. 일에 조금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괭이 하나만 있어도 어떤 일이든 능히 해낼 수 있다. 부지런한 농부의 일과는 늘 새벽에 시작되느니라.”

    

 

메소포티미아 강 언덕에 앉아 4천 년 전 늙은 농사꾼 아비는 아들에게 농사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이렇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부지런하거라, 부지런하거라······ 땀을 흘리는 것 밖에 없느니라.’

    

 

해질 무렵, 저 먼 델타지대의 충적지를 바라보며 아비가 들려주는 교훈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우리 농서가 들려주는 가르침도 수메르 늙은 농부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볍씨는 넉넉히 뿌리고 새는 쫒아 버리라거나, 논마다 10분의 1은 모를 기르고 나머지 10분의 9는 모를 심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또 보리는 마르는 대로 수시로 타작해야 하고, 농가의 바쁨은 보리 수확 때보다 더 할 때가 없어야 한다는 것도 같다. 조선의 농사군 아비는 아들에게 이와 같이 당부한다.

    

 

“(아들아,) 옛 말에 이르기를 보리를 거두어들이는 일은 불을 끄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니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하거나 게을리 한다면 손해를 보게 되느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최고의 교훈으로 다음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옛 말에 이르기를 호미 머리에 스스로 100본의 벼가 있다(鋤頭自有百本禾)하였다. 모는 사람의 공을 알아준다(苗知人功)고 하였다. 명심하거라.”

 

 

호미를 부지런히 움직여 잡초를 제거하고 땅을 북돋워줄 때, 호미 끝에 1백 알의 벼알이 달라붙는다는 애기다.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공을 들여야 낱알을 수확까지 하게 되는지 말하고 있다. 또 벼는 농부의 피땀을 알아준다고 하였으니, 이는 쌀알 한 톨이 생산되기까지 농부의 손길이 990번 닿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농사의 수고스러움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말은 없다.

 

농사는 아무리 기계화돼도 결국 길들여지지 않은 대지를 쟁기로 갈고[], 씨앗을 뿌리고[], 땀이 멈추지 않도록 한여름 뙤약볕 밑에서 노역[]을 다한 다음에야 알찬 수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오죽샜으면, 땀을 줄줄 흘린다는 뜻의 유한임리(流汗淋漓)로 임하라고 할까. 지고한 노력만이 수확의 기쁨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수천 년에 걸친 만고불변의 농사 원칙이 이것이다. 오랜 시간 인류사, 인간사에 검증된 부동(不動)의 지식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충실한 이해와 피땀에서 나온다. 이 노역이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세상을 끌어안게 하고, 그런 활동 속에서 세상을 향한 인식의 팔을 뻗게 하여 주었다.

 

삶은 경작이다. 숫한 씨고르기와 땅가꾸기를 함으로써 대지는 황금들판으로 뒤덮이고 농부는 가족을 부양한다. 땀으로 적셔지지 않는 삶의 진솔한 현장이란 없다. 한 숟가락의 밥을 낳는 저 대지는 인간 자신이 삶을 경작하는 가장 성스러운 곳간이기도 하다.

 

늙은 농부의 가르침은 저 먼 옛날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흘러, 조선 농부의 맨 흙에 담근 발에 와서 닿고, 하루 노역으로 지친 사람들의 가슴을 강물처럼 적신다. 인류의 일부로서 우리는 그 강과 맞닿아 있다. 이보다 더 삶을 진실 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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