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오르는 물이 주는 역발상의 교훈

 

지구 전체에는 약 135600세제곱미터의 막대한 물이 존재한다. 그 물은 안개, 수증기, 빗방울 등 다양한 양태로 순환하다가 종국에 가서는 비로 내린다. 이렇게 올라간 수증기는 비가 되어 한 방울의 빗방울은 1제곱센티미터 당 약 0.18킬로그램의 힘으로 지표면을 때린다.

 

한 방울의 비가 떨어지면 그걸 신호로 1초간 100제곱센티미터의 지면에 약 13만 개의 물방울이 떨어져 메마른 대지를 적셔 나간다. 이 힘은 모아져, 격언에서도 말하듯, 바위도 뚫는다. 이 힘은 엄청나다.

 

예컨대 1시간에 25밀리미터의 호우가 4제곱킬로미터의 땅에 쏟아지는 힘은 100마력짜리 자동차 엔진을 전속력으로 가동시키는 힘과도 같다. 이 엔진은 물의 특성상 낮은 곳으로 향하며 거대한 힘을 일으킨다. 여름 홍수가 불러일으키는 위력을 떠올리면 금방 상상이 갈 것이다.

 

한번 땅에 떨어진 물은 계속 돌고 돌아 다시 쓰인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때의 물은 노아가 방주를 띄웠던 바로 대홍수 때의 물이기도 하고, 고구려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하백(河伯)이 다스리던 물이기도 하며, 남지나해를 지나 한반도에 몰아친 여름 태풍이 끌고 온 물이기도 하다.

 

한번 쓰였던 물이 계속 쓰이는 일원다용(一源多用)의 세계이자, 계속해서 쓰이는 일원구용(一源久用, one source eternal-use)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처럼 물은 줄지도 늘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쓰이고 있다. 그 점에서 결국 지구가 생겨날 때 같이 생겨 난 같은 물이 계속 돌고 돌아서 해양, , 수목의 잎을 통해 증발해서 대기와 뒤섞이고 다시 비가 되어 지상에 내려 와 바다로 되돌아가는 시작도 끝도 한도 없는 무한 순환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수력학에서는 수문순환(水文循環, hydrological cycle)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만약 이 원리를 문학에 비유하자면 영겁회귀(永劫回歸, Eternal return)라고 부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를 가리켜 연기(緣起)라고도 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목표도 의미도 주어져 있지 않으며, 목적도 의미도 없는 상태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 인간 삶의 실상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니체는 영겁회귀 사상을 통해 천국의 경험을 피안으로 미루지 말고 현세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정신의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무주의를 긍정하는 인간, 영겁회귀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인수하는 인간만이 강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물의 순환 원리가 인간의 철학적 사유와 맞닿는 대목이다.

 

근원적인 면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전제하에 물을 바라보면, 오늘 아침 계란을 삶은 물은 오래 전 클레오파트라가 목욕을 위해 나일 강에서 퍼 올린 물일지 모르며, 어제 먹은 감자는 아르키메데스가 들어갔던 목욕탕의 물로 삶았을는지도 모른다. 또 내가 태어날 때 터졌던 어머니의 양수는 저 먼 대양의 물이 증발해 지하에 스며들었다가 어머니의 입을 통해 모태에 까지 흘러 들어온 것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배는 해양의 원시수를 담고 있는 생명의 배아이기도 하다.

 

지질학자인 루나 B. 레오폴드에 의하면, 지금 지중해로 흘러드는 물은 알고 보면 어제 지중해에서 증발한 바닷물이다. 지중해에서 증발한 물의 양이 궁극적으로 각지의 강에서 흘러든 수량과 거의 같은 건 이와 관련 있다. 한마디로 수문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증거다

 

순환의 대원칙 하에 물은 어김없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흐른다. 수증기 형태로 증발하지 않는 한 물의 이 같은 현상은 변치 않는다.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물을 수기(修己)의 한 방편으로 삼았는데, 명경관수(明鏡止水)야 말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수신의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물과 관련되어 가장 유명한 동양의 철인은 아마도 노자일 것이다.노자》〈도덕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나 스스로를 내세우지 아니하며,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스스로를 둔다. 따라서 도에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 而不爭 處衆之所惡 故幾於道)

 

노자는 하심(下心)’, ‘늘 마음을 밑에다 두고 상대방을 대하라고 말한다. 이 보다 인간 심성의 본질에 더 다가간 말이 어디 있을까? 노자가 살아 있다면, 그의 수제자가 되어 인간사를 관통하는 저 정신의 명징함을 따라서 추구하고 싶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15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 23.4x15.7cm, 국립박물관 소장). 물을 바라보는 선비를 통해 수기(修己)를 인격 수양의 주요 과정으로 여겼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심적 상태는 조선 사회의 도덕적 기준과 사회적 품격을 높이 끌어 올린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수신제가(修身齊家)야말로 곧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세계로 나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물을 바라보는 저 선비는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머물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있게 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강한 것을 지배한다는 노자 사상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가지 성찰에의 철학은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자신을 수행하는 정신적 각성제가 된다.

 

물은 언제든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에 겸손과 겸양의 미덕에 비유되곤 한다. 하지만 어떤 물은 반대로 위로 올라가 우리를 난처하게 한다. 내려 가야할 물이 올라가니 중력의 법칙을 거스른다. 과학에서 모세관 현상이라 불리는 삼투압 작용이 그것이다. 물 분자가 다량으로 집중해 있는 곳에서 집중도가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현상을 가리킨다.

 

나무가 20미터나 되는 줄기를 통해 물을 빨아올리는 원리도 이것이다. 삼투압은 뿌리에서 줄기를 통해 잎까지 물을 보내는 하나의 강한 추력(推力, 미는 힘)이다. 이때 물 분자와 다른 화합물 분자끼리 서로 잡아당기며 식물의 미세한 관()을 통해 액체인 물을 끌어올리는데, 이 작용이 바로 모세관 현상이다. 이 작용만으로도 대개의 식물은 수 미터나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다. 게다가 대기압이 물을 밀어 올려 식물 속의 낮은 기압 부분을 채운다.

 

삼투압 작용과 모세관 작용은 물이 나무속을 놀랠 만큼 높이 올라가는 것에 대해 주요 설명은 되지만, 모든 설명이 되고 있진 않다. 아메리카 북서부 연안에는 높이가 120미터나 되는 레드우드라는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뿌리는 지하 15미터 깊이에 잠입해 있어 물은 135미터나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물을 나무 끝까지 올리는 압력만도 해면 기압의 12배 이상이 된다. 두 번째로 큰 나무 종류인 자이언트 세코이어 경우에도 높이가 82미터나 되는데, 이 두 나무는 그 높은 곳까지 어떻게 물을 끌어올려 보내는 것일까? 가장 믿을 수 있는 학설은 물에 특유한 어떤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물이 갖고 있는 장력(張力), 즉 떼놓아지기를 꺼리는 힘이 원인이다.

 

수소결합수가 액체 속의 분자를 잇는 힘은 극히 강해서, 기둥 모양의 물은 어떤 의미에선 강한 쇠사슬 같은 힘을 발휘한다. 실험에 의하면, 가는 밀폐된 관 속에 봉입된 물은 1제곱센티미터 당 약 360킬로그램의 물을 끌어올리는 힘을 산출해 낸다. 이 장력은 모든 액체 중에서 수은 다음으로 강하고, 어떤 종류의 금속의 장력에도 버금간다.

 

식물 수액의 장력은 1제곱센티미터마다 약 200킬로그램 정도로 그다지 크진 않지만, 이걸로도 나무 섬유질의 관에 봉입된 수액의 가는 기둥을 수 백 미터는 잡아 올릴 수 있다. 이 높이는 어떤 나무의 높이도 상회한다. 이처럼 물은 모든 방향으로부터 결합하고, 물끼리 서로를 끌어당기는 성질이 작용한다.

 

이처럼 놀랄만한 물이지만, 물의 장력도 그 힘이 나무 기둥의 물에 작용하지 않는다면 나무를 기어오르지는 못한다. 이 힘을 낳는 것이 바로 증산(蒸散, transpiration, 식물체 내의 수분이 수증기가 되어 밖으로 발산되는 것) 작용이다. 물은 잎에서 증산할 때 세포막의 집중 작용을 저하시킨다. 세포막은 잃은 물 대신 싹눈 속에 액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물 분자를 빨아올린다. 이런 물 분자의 이동은 흡사 물의 머리를 잡고 끌어당기듯 나무속에 있는 물을 잡아끌어 올린다. 이 나무 기둥 속의 물은 잎에서 뿌리까지 이어져 있기 때문에 위가 끌어 올려 지면 동시에 밑에 있는 물 분자가 자동으로 끌어올려지는 것이다.

 

이 같은 이론을 통해 추론해볼 수 있는 게 있다. 물의 각 입자는 135미터나 되는 레드우드 나무 꼭대기까지 홀로 기어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의 입자가 당겨 주고[장력] 뒤의 입자가 밀어주는[삼투압] 협업에 의해 입자들은 계속해서 위로 올라간다. 자연계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에 올라타 정상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이처럼 물이 위로 올라가는 힘은 흩어지는 운동과 전진 운동에 의해 일어난다. 대자연계가 보여주는 놀라운 품앗이이자 두레다.

 

그런데 물은 왜 올라가는 것일까? 식물의 생장을 위한 수분 공급이 주목적이지만, 꼭대기까지 올라간 물은 다시 증발되고 저 아래로 흘러 세상을 보다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물은 이런 순환 반복의 운명으로 태어나 영겁의 시간 동안 자기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자연이 지닌 근본적인 뜻, 즉 대자연의 원의(原義)가 여기에 있다. 해서 이 대목에 이르면 노자가 바라보는 물이나, 고사관수도의 선비가 바라보는 물이나 다 그 이치가 같다는 것 알 수 있다.

 

같은 의미에서 불생불멸의 존재로서 우주를 무한 순환하는 불교와 힌두교에서 이야기하는 신들과도 같다. 힌두에서 말하는 사라스바티(Sarasvati) 여신은 산스크리트어로 흐르는 자(the one who flows)’라는 뜻이다. 이 신은 천지창조 때 만들어진 힘과 지성의 결합을 상징한다. 지자요수(知者樂水)라는 말처럼 물이 지닌 특성을 반영한 것일 게다.

 

이처럼 물이 지닌 고유한 특성인 지고하기 그지없는 수평과 수직 원리를 아는 것은 인간사의 모든 지혜를 꿰는 것과도 같다. 지금 그대 손에서 떨어진 한 방울의 물이 지구를 순환시킨다. 어찌 한없이 겸손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PREV 1 2 3 4 5 ... 825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