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용소분(侵用消紛) 내외부 혼란을 통해 자국의 분란을 해소한다

 

1359년 고려에 침구한 왜구는 이 해 5월을 고비로 기세가 다소 수그러들었다. 왜구 발호로 국가적으로 치명적인 내상(內傷)을 입은 고려로서는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는 휴식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여우를 피하자 범이 나타난다고 그 해 11월에 접어들자 고려는 또 하나의 외침 세력인 홍건적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게 된다.

 

이를 1차 홍건적의 난과 이에 대응한 홍건적 토벌전쟁이라고 부른다. ‘북로(北虜)’로 말미암아 고려는 핍진한 군사력을 모아 홍건적 토벌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방력이 북으로 향하자, 왜구는 이를 기화로 대거 침구를 감행해 온다. ()로서는 고려의 국란은 간절히 바라던 바였고, 약탈의 절호의 기회였다.

 

고려가 가까스로 홍건적을 격퇴시킨 것은 136043일이었다. 그로부터 약 반 개월이 경과한 420일 왜구는 경남 사천과 사량을 다시 침구했다. 이 무렵 고려는 바로 직전까지 홍건적 토벌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구 침구에 대처할 만한 태세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왜구는 이를 틈 타 거의 무방비상태나 다름없는 고려의 해안과 도서지역을 종횡무진으로 유린하며 거침없이 북상했다.

 

홍건적 및 왜구 토멸사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 토멸사는 전란이 한반도 전국 각처에서 벌어졌고, 피해도 전국적 범위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북로(北虜)와 마찬가지로 남왜(南倭)의 침구는 국가적 전란에 버금가는 침략행위였다. 특히 왜구 침구는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는 것이 특징으로 한반도 국가에 상시적 준전시 상태를 몰고 왔다. ()에 의한 침구 행위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성을 띠고 있다. 또한 쉽사리 근절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왜가 주도한 지속가능한 전쟁으로써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한일 관계는 독도 문제,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서도 왜구 침구가 지속되고 있는 양상이다. 국란 종식을 위한 우리의 태세가 무엇이어야 할지 오랜 왜구 침구사는 잘 드러내 주고 있다.

 

13604월 하순부터 윤 5월 초순까지 조선의 해안지대를 약탈하던 왜구는 1361년에 이르자 년 초부터 조기행동을 개시해 222일부터 남해안에 출현했다. 이 해는 왜구 침구가 년 초부터 시작됐다는 점에서 힘겨운 한 해가 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일종에 어얼리 스타트(early start)’를 한 것이다.

 

5월부터 8월까지 왜구는 경상도 남해안 일대에 집중적으로 침구했다. 그런데 이 해에는 북쪽으로부터도 침입이 가중되며 그야말로 국란의 규모를 예측할 수 없었다. 10월 들어 10만명에서 30만명으로 이루어진 홍건적의 대규모 재침을 받게 되면서 고려는 서북계로부터 개경에 이르는 내륙지역이 완전히 초토화 되어 버렸다. 이 시기 고려는 홍건적 토벌 작전에 많은 전력(戰力)을 소모하게 되면서 대()왜구 작전에서는 큰 차질을 빚게 된다.

 

13773, 왜구가 경기도 근해에 출몰해 수도 개경을 위협하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왜구들은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경상도 지역을 침구했다. 경상도 지역으로 침구한 왜구는 어느 특정지역으로 공세를 집중하지 않고 여러 지역으로 분산해서 파상적인 침구를 계속했다. 왜구의 분산 약탈 전략은 고려군의 대()왜구 방어 작전에 큰 어려움을 겪게 했고, 왜구의 빈번한 기습공격으로 인한 피해는 막심했다.

 

우왕 말년인 1385년 이후부터 1387년 사이에 왜구의 폐해는 현저히 감소되는 추세를 보였다. 그러다가 고려가 요동정벌을 추진하면서 국방력의 대부분이 북방지역으로 집중되자 남방지역의 방어는 다시 취약해 진다. 그러자 왜구는 1388년부터 또다시 고려에 적극적인 침구를 시도하는 태세를 보인다. 늘 빈틈을 엿보다가 결정적인 침구 시점이 도래하면 과감하게 약탈 행위에 나선 것이다.

 

왜구가 침구를 다시 본격화하는 움직임을 보인 13885, 요동 원정군을 이끌고 압록강 위화도까지 진출했던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는 돌연 회군을 단행한다. 이성계는 회군 직후인 6월 정적(政敵) 최영 일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시킨 다음, 창왕을 옹립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그 후 7월부터 고려는 북방으로부터 철수한 군사력을 왜구토벌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적극적인 대()왜구작전에 나선다. 왜구 침구에 의해 우리 역사상 요동 수복이라는 숙원 과제가 발목이 붙잡히며 무위로 끝난 것이다.

 

한국사에서 일본의 역할을 평가할 때, 일본은 늘 한반도 웅비의 조건을 제약하는 역할을 자임해 왔다. 이는 고대 시기뿐만 아니라, 근현대사 전개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근대시기 자생적 발전구조가 저해된 것이나, 해방 이후 독립국가로 나아가지 못하고 분단의 비극을 맞이한 것도 일본의 악영향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이 점은 피치 못하게 양국 관계사에 악연의 일획을 긋고 있다.

 

고려 말, 일본은 남북조 쟁란으로 정치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탁했다. 내부 혼란으로 인해 일본 서부지방의 연해민들은 왜구로 변신했고, 특히 1392년 남북조 쟁란이 북조의 승리로 끝나자 여기서 패한 남군의 잔당들마저 대거 해적군 또는 무력상인으로 탈바꿈했다. 이 시기는 일본발() 해적떼가 인접 지역과 국가를 무차별 침구하며 동북아시아를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대혼란기였다. 일본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왜구 증가는 이처럼 비례 관계에 있다.

 

왜구 발생은 일본으로서는 내부 권력 싸움에서 밀린 세력이 바다라는 출구로 내몰려짐으로써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라디에이터 효과를 가져 온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내 문제가 항시 주변국 침구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일본 내부의 안정은 매우 중요하다. 훗날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는 주요 요인도 일본 내 정치 불안에 근거한다. 임란왜란이 일어난 1592년 일본에 머물고 있던 서양 선교사가 쓴예수선교회 연례 부록편은 임란왜란 발발 원인과 토요토미의 침략 근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해 주고 있다.

 

토요토미는 여러 번 자신의 신하들과 친밀한 대화에서 말하기를, 일본 내에서는 더 이상 올라갈 명예가 없으며, 이를 다른 곳에서 찾지 않는다면 현재 누리고 있는 세력에서 자신이 밀려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중국 정복을 꾀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높이고자 하였다. 토요토미는 일본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으며, 앞으로 자신의 왕국 내에서 발생할 폭동이나 전쟁을 방지할 수 없을 것으로 진단하고서 중국 원정을 실행하기 위하여 이때가 절호의 기회라고 확신하였다.

 

내부 혼란을 밖으로 돌리고자 한 일본의 시도는 오랜 시간 동아시아 안정에 절대적인 위험 요소로 작용해 왔다. 1868, 일본의 체제 대전환기 속에서 나타난 침략주의 발로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당시 명치유신 정부의 권력 중추에 있던 기도 다카유시(木戶孝允)는 일본 내부에 일던 농민과 무사계급의 불만을 외정(外征)으로 돌려 돌파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조선에 신속히 사절을 파견해 그들의 무례를 따져서 그 죄를 물어서 공격해야 한다며 조선에 시비를 걸어 전쟁을 일으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명치 정부 시기, 외무권소록(外務權少錄)을 지낸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의 주장과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일치한다. 그는 일본 내 실업자가 된 50만 무사들이 내란을 일으킬지 모르니 내란을 바깥으로 돌리기 위해절호의 시기를 놓치지 말고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주장한 정한론(征韓論)’은 마침내 18759월 군함 운양호를 조선에 보내 강화도 사건을 일으키는 배경이 된다. 근세 일본의 조선 침략은 이로써 본격화된다.

 

1870년대 일본 정부 수뇌부 사이에서 주창된 정한론은 귀족의 반정부 열기를 밖으로 돌리려는 계책이었다. 막부 말기 이래 외부 압력에 직면해 온 이들 사이에 침략주의 사상이 넓게 퍼진 것은 근대 동아시아 세계 전체를 피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원인이 된다. 문명 개화를 강조하고, 학제 개혁을 내세운 일본 명치정부가 정한론자들이 주도한 정권이었다는 점은 이들이 궁극적으로 의도한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일본의 근대화와 군국주의간의 상호 연계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임진왜란 후 조일평화를 내세우며 양국은 교류해 왔으나, 270~8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일본 내에는 여전히 토요토미의 자식들새로운 근대 왜구로 변신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오늘날 들어서도 그대로 이어지며 일본의 극우파들의 재침 야욕으로 침략의 대물림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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