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농법에서 배우는 놀라운 혁신의 비밀

 

자원 빈국인 대한민국이 눈부신 성과를 이끌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기존에 해오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 혁신의 깊이나 크기도 달라져야 하며, 전체 판을 뒤엎는 획기적인 발상이 뒤따라야 한다.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맥락을 알고, 전체 해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성장의 덫에 갇힌 현재의 답답한 교착상태를 깨뜨릴 수 있다. 이 점에서 조선 초 혁신 농법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적절한 해법이 되어 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농사기술의 성전(聖典)이라 할 농사직설(農事直說)(세종 11)은 농업생산성과 구조 혁신 분야에서 완전히 다른 차원을 열어젖힌 실험연구서였다. 농법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타분야로 확장된 확산적 사고(divergent thinking)의 전형적 예이다. 나아가 문제의 뿌리까지 들어가 파악하고 체득한 현장 지식의 총아라 할 수 있다.

 

농업은 경제 살리기의 기초가 되었고, 전 분야로 확산돼 누층적 창조 효과를 가져왔다. 집약 농업의 결과, 생산성은 극대화되고 세수(稅收)는 증가하였고, 일반 백성들이 부담하여야 할 세율도 1/10에서 1/20100퍼센트나 경감되었다. 성장과 분배 면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됐다. 이 농법의 어느 면이 그렇게 탁월하였던 것일까? 선조들의 지식을 알아 오늘날 여러 분야에 응용할 수는 없을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선 직설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세종 정부는 국가의 지속성, 백성들의 삶의 안정성을 꾀해 세종 10년부터 본격적으로 먹거리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해법을 찾는다. 세종 104월 경상도 감사로 하여금 지방관들이 각 고을의 나이든 농부[노농(老農)]들을 직접 찾아가 그 지방의 풍토에 맞은 농사법을 자세히 물어 보고케 한 것을 필두로 농법 혁신에 나섰다. 현지 관리들은 인터뷰를 통해 민간의 혁신농법을 찾아냈고, 이를 구체화해 중앙 정부에 올려 보냈다. 조선 농법이 근본부터 달라진 배경이다. 정지하고, 파종하고, 김매는 것은 물론 수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이때 체계화됐다. 여기에다 오곡이 땅의 성격에 따라 달리 자란다[토성소의(土姓所宜)]는 땅과 곡식간의 원리와, 잡곡을 교배해 우량종자를 만드는 법[교종(交種)]까지 알아냈다

 

이 작업의 가장 큰 의의는 민간에 숨은 암묵지(숨은 지식)를 끄집어 내 국가적 명묵지(드러난 지식)로 전환시킨 것이다. 지식 발굴과 활용 면에서 가히 메가톤급에 해당하는 역사(役事)였다. 그 결과 지방민들이 이미 알고 시행하는 바[인지기시지험(因地己試之驗)]는 하나의 원천 소스로 모아지고 추려져[촬요(撮要)되어] 속속 조정에 올라왔다. 이어 7월에는 전라, 충청 두 개도로부터 농사 관련 조사 자료가 올라왔다. 양 지역 병행 조사를 통해 데이터 수집의 안정성을 꾀한 일종에 백업 기능을 가동한 것이다.

 

취합된 농사 관련 데이터들은 총재 정초(鄭招)와 종부소윤 변효문(卞孝文)의 손에 들어가 군더더기 없이 요약되고, CRM(내외 자료를 분석해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되어 1년 후 19쪽의 간결한 농서로 엮여졌다. 농사에 관한 직접적인 이야기만 다룬 까닭에 직설(直說)이라 이름 붙여진 이 농법 교범서는 세종 정부에 의해 전국 각도의 농민들에게 배포되었다. 전라, 충청, 경상도의 가장 선진적인 농법이 후진적 농업지역인 함경도에까지 확산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최초의 혁신적인 경종 농서는 전국의 농사 현장으로 달려 나간다.

 

이 책이 농업 생산성 향상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몇 가지 사례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우선 시비법(施肥法)을 들 수 있다. 가을에 거름을 뿌려 땅을 갈아버리면 겨우내 거름이 숙성되는 원리를 통해 토지의 비옥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가을에 땅을 갈아 푸른 것은 다 없애 버린다고 해서 추경법이라고도 부르고, 거름을 뿌린 후 논밭을 갈아 버린다고 해서 선분후경(先糞後耕)법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시비법을 체계화시킨 결과, 과거에는 한 해에 농사를 짓고 나면 지력이 감퇴되어 다음해에는 쉴 수밖에 없는 휴한법(休閑法)이 일반화 되었는데, 이제는 토지를 한 해라도 놀릴 이유가 전혀 없어졌다. 이렇게 되자 해를 바꿔 농사짓던 방식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경작이 가능 토지를 가리켜 해를 바꿔 농사짓는 땅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불역지지(不易之地)라고 부른다. 물론 이때 중급이나 하급 땅의 경우에는 한 해를 묵히거나[일역지지(一易之地)], 두 해를 묵혀[재역지지(再易之地)] 지력을 돋우기도 했다.

 

또 지력이 떨어진 땅은 황토를 뿌려 지력을 돋운 다음 다시 경작해 토지 사용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켰다. 이 방식을 객토법(客土法)이라고 부른다. 농법에서 생겨 난 묵은 땅을 갚아 엎어 버리는 방식은 다른 분야에도 쓰여 낡은 방식을 뜯어 고치는 창조적 구조 혁신으로 나타난다. 지력이 떨어진 땅에 외부의 황토를 갖다 뿌려 지력을 돋구는 객토법은 인사 분야에서도 쓰여 외부 인재 아웃소싱(out-sourcing)으로도 쓰인다. 조선선박 개량 사업 시 일본인 선박기술자인 평도전(平道全)을 상호군(오늘날 군대의 소장, 기업에선 전무급에 해당)이란 벼슬을 주어 스카우트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농법지식이 변용운용되어 쓰인 예이다.

 

한 두 해 땅을 놀린 다음에 농사를 짓던 휴한법에서 해마다 농사를 짓는 연작상경법(連作常耕法)으로 전환하자 과거에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던 11작은 이제 기본 경작법이 된다. 여기에 종자를 콤비네이션으로 파종해 12(+보리), 23(+보리+휴한+)도 가능해졌다. 또 여기에 간종법(間種法)’이라 하여 작물과 작물 사이에 다른 작물을 심는 방법을 도입했다. 예컨대 콩밭 사이에 가을보리를 심거나, 보리밭 사이에 조를 파종하는 것이 그것이다. 후에 옥수수가 들어온 뒤에는 옥수수 밭 사이에 녹두나 팥을 심어 같은 토지에서 생산성을 몇 배로 늘렸다. 요즘 식으로 생산 라인을 최적화해 생산성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철저한 데이터 마이닝(data-mining) 결과다.

 

그뿐만이 아니다. 농법 지식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혼작(混作)경영을 통해 밭벼2, 2, 2나 참깨3, 밭벼2의 비율로 종자를 섞어 뿌려 먼저 자라는 식물부터 수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때에는 먼저 자라는 것과 나중에 자라는 것은 상호 간섭하지 않고 상승 작용을 일으켜 효율성이 극대화되도록 했다. 이 혼작경영은 단위 토지당 생산성을 극대화시킨 방법이기도 하지만 철저하게 원금 의식을 지닌 방법이기도 하다. 즉 어떤 가뭄이 들어도 파종한 종자 중 어느 한 작물은 반드시 수확하게끔 되어 있다. 참깨 같은 작물이 아무리 가물고 척박한 돌밭에서도 잘 자라는 걸 생각해 보시라

 

여기에는 식물마다 생장의 특성을 고려한 고난이도 지식이 조합됐다. 직설에 투입된 지식은 식물학, 생태학, 지질학 등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올리는데 요구되는 모든 지식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각 지식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걸 알 수 있다. 당대 천재들이 만들어 낸 프로세스 혁신의 모범적 사례다. 한반도에 도입된 농법 역사상 이처럼 강력한 지식 혁신과 지식 연계가 벌어진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혁신 농법을 보급한 결과 생산성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수치만 봐도 바로 잘 알 수 있다. 고려 초에 1(, 3000)에서 평균 6~11석이 생산되던 것이 1430년에는 전라·충청·경상도에서 20~30석 내지 50~60석이 생산된다. 300~600퍼센트의 생산성 향상이 있었던 것이다. 씨 뿌린 것을 따지자면 고려 초에 파종 후 약 3배 정도를 수확했는데, 이때 40배를 수확했으니 4,000퍼센트의 혁신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히 혁명적인 농법이었다.

 

농법 혁신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 농법에서 이룬 혁신 활동은 다양한 경영 방법으로 계승돼, 경영환경 개선책인 시비(施肥)경영’, 아웃소싱 방법인 객토(客土)경영’, 준비 경영법인 추경(秋耕)경영’, 2의 수익원 개발법인 간종(間種)경영’, 무한확장과 원금보장법인 혼작(混作)경영으로 구체화됐다. 창조의 무한 역동성이 전시대전 산업 분야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6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획기적인 농법이 지닌 함의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탁월성의 경영을 이뤄내려는 당대 사람들의 끝 모르는 도전이 함축된 것이다. 이를 위해 세종은 몸소 궁궐 후원에다 2홉의 조를 30여 평[1()]의 밭에 뿌려 1섬의 소출을 올리는 실험을 해 보기도 했다. 가능성을 스스로 타진하고 농부의 노역을 몸소 느끼며 공감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한 국왕은 스스로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내가 서속[, ] 씨앗 2[]을 후원(後園)에 심었더니 그 소출이 한 섬이 더 되었다.(予以粟種二合, 種於後園, 其所出一石有奇세종 19(정사) 98)

    

 

세종 시기 농업은 생산성 향상 면에서 뚜렷한 목표치가 있었다. 최저 두 배[이배(利倍) 200퍼센트)]는 기본이고, 더 하면 다섯 배[이사(利蓰) 500퍼센트] 이상 되어야 함을 천명하고 있다. 대단히 야심찬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농법의 목표는 배수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3년 후 세종은 다시 농법 혁신을 위한 실험에 몸소 나선다.

 

 

내가 후원(後苑)1()의 밭을 경작하는데, 비록 가뭄을 당하여도 소출의 수량이 풍년에 뒤지지 않으니, 이것은 사람의 힘을 다한 까닭이다.(予於後苑耕一畝之田, 雖値旱乾, 所出之數, 不下於豐年, 是乃盡人力之所致也세종 21(기미) 728)

    

 

세종 스스로 기울인 노력이 어떠했는지 국왕은 진인력(盡人力)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혁신에의 노력과 경험은 7년 전 실험을 회고하며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사람이 할 수 있는 극한의 노력을 다하면[극인력(極人力)]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굳건한 소신으로 자리 잡는다.

 

세종의 무한 혁신의 답이, 극인력(極人力)이라는 것이다.

 

이 피나는 탁월성의 성취를 기념해 세종은 장문의권농문(勸農文)을 써서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려 한 이유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철학 있는 국가 경영의 산 모범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세종 정부는 왜 그토록 엄청난 목표를 잡고 매진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가는 삶의 즐거움’, 즉 생생지락(生生之樂)의 경험을 주려 했기 때문이다. 창조적 성취를 얻는 것만이 특정 계급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닌 모든 백성들이 다 같이 밝고 너그러운 즐거운 상태[희호지락(熙皞之樂)]를 만드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국왕은 당찬 포부와 감회를 밝히며 다시 한 번 진력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근일에 경험한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정사년(세종 19)에 후원(後苑)에 농사짓는 것을 시험하여 사람의 힘을 더 할 수 없이 다 하였더니 과연 가뭄을 만나도 한재(旱災)를 일으키지 않고 벼가 매우 잘되었다. 이것은 우연히 천재를 만나더라도 사람의 힘으로 구제할 수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以近日所驗言之, 歲丁巳, 於後苑試治田極人力, 果遇旱不能爲災, 禾頗稔熟是則偶爾天災, 其以人力而可救也審矣세종 26(갑자) 725)

    

 

농업 생산성 문제는 고려조는 물론 태종 때에도 깊이 관심을 보인 분야다. 태종은 농상집요(農桑輯要)를 복각해 보급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이 중국 원나라를 배경으로 한 농서라는 점이다. 위도도 북경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졌다. 외래 농서를 단순 번역해서 보급함으로써 우리 풍토와 농부들의 산 경험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당연히 생산성 증대도 크게 기대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세종은 새로운 농서를 편찬하도록 한 것이다. 이 농서의 핵심은 조선풍토를 고려한 자주농법이어야 하는 점, 나이든 농부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를 정리보고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현장에서 데이터를 수집해 정지파종김매기수확, 오곡과 토질의 상관관계, 잡곡 교배 등 강력한 프로세스 이노베이션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 점이 태종 때의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 이 탁월한 농법서는 국토 확장에도 지대하게 영향을 미쳐 때마침 46진이 개척되는 농사후진지역(황해, 평안, 함경)으로까지 전파되었다.

 

태종 때의 방식은 과거의 방식을 재생한 것에 불과했다. 판에 박힌 정답을 추구했다. 기존의 사고와 방식에 머물다보니 문제도 피상적으로 접근해 한 생각에 한 해법(one thinking, one solution)밖에 찾지 못했다. 개량과 개선 수준에 머문 것이다.

 

세종은 이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접근해 조선이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는 심층 질문 하에 추출된 문제를 나열하고, 문제의 본질을 재정의 하도록 했다. 여러 방면에서 제기될 질문과 다른 많은 방식을 찾아냈고, 심층사고를 통해 문제의 해법을 찾았다. 생산적 사고를 부여해 국부 대안이 아닌 전체대안을 마련했다. 독특하고 창의적인 여러 방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다양한 생각이 다양한 해법(diverse thinking, multi-solution)을 부른 것이다. 여기에 집현전의 집단지성이 불에 기름처럼 끼얹어지며 데이터와 경험에서 완전히 다른 방법이 찾아진다.

 

세종 식 창조적 구조 혁신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체로서의 일을 알고, ‘전체 대안을 찾는다는 점에서 오늘날 기업에서 하는 스마트 워크(smart work)와도 같다. 이 농서 편찬이 얼마나 야심차고 대단한 작업이었는지 이후 등장하는 수많은 농서들이직설을 오리지널 텍스트로 삼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후 등장하는 농서인 금양잡록(衿陽雜錄)(1492), 농가집성(農家集成)(1655), 산림경제(山林經濟)(1716년경), 임원경제지(林園十六志)(1827년경) 등이 여기에 영향 받는다. 이 점에서직설은 조선 500년의 경제적 지속가능성을 밑받침해 준 창조적 원천지식 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1962년 농촌진흥청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원천 농서로써 자리매김 하고 있다) 실로 600년에 걸친 탁월한 혁신의 결과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종이 하려한 직설 경영의 요체이다.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농법에서 생겨난 조선은 중국과 다르다는 시각과 자신감이 이로부터 15년 뒤에 훈민정음창제 시 나랏말씀이 중국과 다르다는 대선언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세종은훈민정음이 창제된 지(세종 25, 1443) 1년 후인 세종 26년 이 직설을 한글로 번역해 산간벽지의 촌부도 알아볼 수 있게 보급했다. 농서(경제)와 문자(지식)라는 세종시대 양대 최고 혁신물은 씨줄 날줄로 광폭의 시너지를 내며 하루가 멀다 하고 전국의 가가호호로 퍼져나갔다. 이처럼 조선 농법에서 새삼 배우게 되는 게 있다. 그것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힘은 늘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모르고서는 이 국토와 이 사람들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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